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윈스턴 처칠/평가 (문단 편집) == 평가 == [[나치 독일]]에게서 자유 세계를 지켜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그의 총리 재임 시기를 기점으로 [[대영제국]]이 서서히 쇠락하게 되었고[* 이 평은 문제가 있다. 대영제국이 쇠락하게 된 것은 결국 외부적인 요인이 원인이다. 게다가 이미 [[광란의 20년대|1920년대]]부터 [[대영제국]]은 [[미국]]에 선두를 뺏기기 시작했고 특히 경제력 면에서 보면 이미 미국은 유럽 전체를 능가할 정도였다. 그러므로 그가 대영제국을 쇠락하게 했다는 평에는 논란이 있다.], [[식민지]]를 탄압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.[* 이 평도 문제가 있는 것이 식민지 탄압은 대영제국 출범 이래로 역대 영국 총리가 지속적으로 벌인 일이다, 즉 식민지 탄압은 윈스턴 처칠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] 1~2차 대전의 전간기(1918~1939)에는 [[파시즘]]에 대해서도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며 [[베니토 무솔리니]]를 "[[민주주의]]를 실현할 자격도 없는 [[이탈리아]]를 안정시킨 지도자"으로서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.[* [[에릭 홉스봄]]의 《극단의 시대》(1994) 상권이나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 참조] 또한 [[일본]]에 대해서도 일본은 우리의 동맹국이며 일본과의 전쟁을 고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평가했다. 당시 유럽에서 민주주의는 [[영국]]에서나 성공한 특이 체제로 평가받았고 영국, [[프랑스]]의 엘리트 지식인이나 대학생들조차 파시즘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던 혼란의 시대였다. 하지만 [[아돌프 히틀러]]의 경우 그 정도가 지나쳤던 인물이었기에[* 아예 대놓고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. 뭣보다 집권 후 숨돌릴 틈도 없이 베르사유 체제를 깨나갔다.] 처칠은 그의 등장 초기부터 적대적인 입장을 가졌다. 처칠이 파시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그가 의회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이유도 있지만, [[반공주의]]가 파시즘의 기반 중 하나라는 것 역시 크게 작용했다. 그는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. 1차대전 후 전간기에는 [[러시아 내전]]에서 적군이 승리하고 이후 [[소비에트 연방]]의 수립으로 인해 유럽에는 [[공산주의]]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었고, 처칠도 마찬가지였다. 육군상을 지내던 1919년엔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여 아르항겔스크 전선에 있던 [[영국군]]에게 독가스를 적군에게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고[* [[http://www.nonproliferation.org/wp-content/uploads/2016/03/2008-Chronology-of-Major-Events-in-the-History-of-Biological-and-Chemical-Weapons.pdf|역대 전쟁범죄 리스트]]와 [[https://www.theguardian.com/world/shortcuts/2013/sep/01/winston-churchill-shocking-use-chemical-weapons|가디언 지의 기사]] 참조.], 멘셰비키 혁명가인 보리스 사빈코프와 접촉하기도 했다.[* 사빈코프는 1925년에 소련에 밀입국했다가 소련 비밀경찰에 붙잡혀 옥사했다.] 이후 재무장관에 재임하던 1927년엔 무솔리니와 만난 후 기자회견에서 무솔리니를 격려하고 파시즘을 온 세계에 봉사하고 있다고 극찬하며, "러시아라는 독가스에 대한 해독제"라고 평하기도 했다. 이런 일화들을 보면, 그가 파시즘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파시즘의 반공정신을 높이 산 것이 그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.[* 이건 해당 시점에서 영국이 [[이탈리아]]와 [[독일]]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. [[무솔리니]]는 [[프랑스 침공]] 직전까지만 해도 [[연합국]]과 [[나치 독일]]의 중재자를 자처하고 있었고,[* 한 예시로 뮌헨 협정 당시 중재자로 나선게 이탈리아다.] 별달리 전쟁범죄나 팽창주의적인 행보를 보이지도 않았다.[* 물론 이탈리아가 안슐루스나 뮌헨 협정에도 관여한 점으로 인해 아주 영향을 안 끼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행위들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한 건 독일계 인구가 사는 쥐트티롤 점유의 묵인을 받아낸 것 뿐이다.] 철저한 [[반공주의]]자인 처칠 입장에서 보면, 딱히 나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도 유럽 내의 세력균형을 흔들지도 않으면서 [[빨갱이]]만 열심히 때려잡는 이탈리아 [[파시즘]]은 크게 미워보일 이유가 없었다. 스트레사 체제 붕괴는 [[영국-독일 해군조약|영국이 단초를 제공한 것이라]] 이탈리아를 나무랄 처지가 못 되었기도 하고. 물론 이런 미묘한 사이는 [[1940년]] 이탈리아가 [[연합국]]에 선전포고하고, 무엇보다 [[대영제국]]의 아프리카 식민지에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면서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다.] 물론 1930년대에 이르러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자, 그런 그도 결국엔 파시즘이 영국에 큰 위협이라는 것을 깨달았고, 그에 대항하기 위해 [[적의 적은 나의 친구]]라는 논리로 소련에 점차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고, 전쟁 당시엔 소련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나치에 맞서 싸웠다. 물론 반공 반소련 성향이 사라진 건 아니라 전쟁 후엔 [[언싱커블 작전]]을 계획하며 소련의 뒤통수를 칠 음모를 꾸미기도 했고, 그 유명한 [[철의 장막]] 연설을 통해 소련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. 여하간 처칠의 업적은 전시중에 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이다. [[피델 카스트로]]가 처칠을 칭찬하자, "당신 같은 공산주의자가 왜 처칠같은 반공주의자를 칭찬하는가?"라는 질문이 날아왔고 이에 그는 "[[당신들의 조국|만약 히틀러가 승리했다면]] [[높은 성의 사나이|세상은 어떻게 되었겠는가?]]"라고 답했다. 독불장군 기질도 엄청나서, 차마 처칠이 말한 것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.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전시에는 적절했던 듯. 글자 그대로 '전시 수상'의 전형이다. 감투 정신이 투철했다는 평도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